
명품이 된 자녀, 빚쟁이가 된 부모
내가 마지막으로 서울을 떠난 날, 지하철에서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폰을 들고, 귀에는 에어팟 맥스가 얹혀 있었다. 나는 순간, 그 아이의 어깨에 얹힌 백팩보다도 더 무거운 것이 그의 부모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에서의 삶은 조금 달랐다. 아이들은 헝클어진 머리로 학교에 가고, 옷은 편한 후드 하나면 충분했다. 이어폰이 브랜드든 아니든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아니, 관심조차 없다. 이 두 장면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은 단순히 경제 체계나 사회 보장 제도의 차이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녀에게 무엇을 물려주려 하는가에 대한 철학의 문제이다.
한국 소비주의의 뿌리와 아이폰의 그림자
한국 사회에서 '자녀'는 종종 '가문의 명예 프로젝트'로 여겨진다. 입시, 외모, 패션, 전자기기까지 모든 것이 '투자'의 이름으로 포장된다. 하지만 그 투자의 목적이 아이의 자존감 향상인지, 아니면 부모의 사회적 체면 유지인지는 점점 불분명해진다.
왜 우리는 아이들에게 명품을 쥐여주며 사랑을 증명하려 하는가. 왜 생일 선물로 맥북과 아이폰을 주며 “이 정도는 해줘야”라고 말하는가. 사실상 이는 아이를 위한 소비가 아니라, 부모 자신의 불안을 달래기 위한 소비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불안의 뿌리는 멀리서 온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한국 사회는 ‘비교’를 생존의 기술로 여겨왔다. 누가 더 좋은 대학을 갔는가, 누가 더 좋은 회사를 다니는가, 누가 더 '잘 사는'가. 이 비교의 굴레는 이제 아이들까지 집어삼켰다. 명품은 ‘사치’가 아닌, ‘자기방어 도구’가 되었다.
그 결과, 부모는 등골이 휘고, 아이는 애초에 감당하지 못할 기대치와 외양을 짊어진 채 자란다. 정작 중요한 인격, 감정, 세계에 대한 이해는 자리를 잃는다.
체념 대신 질문을, 소비 대신 대화를
유럽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묻게 된다. 아이에게 ‘최신 기기’가 정말 필요한가? 왜 우리는 아이의 소유물로 아이의 가치를 증명하려 하는가? 유럽의 어떤 부모는 자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네가 '갖는 것'보다 '되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
나는 이 문장을 한국의 모든 부모들에게 건네고 싶다. 더 이상 ‘우리 아이가 뒤처지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에 갇혀 아이를 상품화하지 말자. 오히려 아이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그 질문에서부터, 아이의 귀에는 어떤 이어폰이 아닌, 부모의 진심이 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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