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늘의 일상사

가자 해상 봉쇄, 툰베리, 그리고 '쇼는 끝났다'라는 말

by 마음이 가는 대로 2025. 6. 10.
728x90

툰베리

 

단순한 해상 충돌이 아닙니다.

가자지구로 향하던 매들린호가 이스라엘군에 의해 억류됐습니다. 이 소식을 접하면서 저는, 우리가 지금 목도하는 것이 단순한 영해 침범이나 외교적 불협화음이 아니라, 도덕적 구조 신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툰베리와 국제 활동가들이 탄 그 배는, 물리적으론 조그만 범선이었을지 몰라도, 상징적으로는 국제 양심 그 자체였습니다.

셀카 요트? 쇼는 끝났다? 오히려 세계는 이제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외무부의 반응이 특히 눈에 걸립니다.

"유명 인사의 셀카 요트가 도착했다. 샌드위치와 물도 줬다. 쇼는 끝났다."

 

저는 이 발언을 보며 참담했습니다.

 

국제적 활동가들이 어린아이용 분유와 의료품을 싣고, 전쟁과 봉쇄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닿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셀카", "쇼", "물과 샌드위치" 같은 말로 반응했다는 건, 최소한의 공감 능력마저 실종된 외교언어의 실패라고 봅니다.

이스라엘의 안보 우려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마스라는 위협이 실존한다는 사실도 압니다. 하지만 그런 안보의 논리가 모든 인도적 시도를 냉소적으로 묵살하는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국제법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에 대한 질문입니다.

가자지구에 대한 봉쇄가 오랜 세월 지속됐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무기 밀수를 차단하기 위해 봉쇄가 불가피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봉쇄가 실제로 무고한 민간인 수백만 명에게도 고통을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쓰러지고, 병원이 전기 없이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 '안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툰베리와 같은 활동가는 이런 구조적 폭력에 맞서 상징적 저항의 메시지를 던진 것입니다.
그 메시지는 단순한 '행동주의 쇼'가 아니라, 세계 시민들이 지금 이 순간 어떤 쪽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나.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중동과 먼 나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우리에게 식량과 약품을 보내준 수많은 얼굴 없는 구호인들을 기억한다면, 지금 고통받는 팔레스타인의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보내는 툰베리의 그 배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오늘 기억해야 할 것은 툰베리의 메시지보다, 이스라엘 외무부의 태도일지 모릅니다.
냉소는 절대 진실을 이기지 못합니다. 역사는 늘, 그런 냉소를 넘는 사람들의 헌신에 의해 한걸음 전진해 왔습니다.

 

"쇼는 끝났다"는 말에 저는 이렇게 대꾸하고 싶습니다.

"아닙니다. 이제 세계는 더 많은 눈으로 보고, 더 큰 연대를 시작합니다."

 

정치는 언제나 선택입니다.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저는 항상, 고통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고 싶습니다.
그것이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최소한의 존엄이니까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