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일상사

빚 탕감 추진! 도저히 좋게 볼 수가 없다. 다 갚은 나는 뭔가!!

마음이 가는 대로 2025. 6. 20.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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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탕감정책

누가 '정의'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

사회가 점점 희미해질 때가 있다. 기준이 흐려지고, 정의라는 말이 권력자의 입에서 나올 때마다 울컥이는 감정이 드는 순간들. 나는 오늘 아침, 정부가 발표한 '취약계층 빚 탕감' 뉴스를 보며 그런 감정을 또다시 경험했다.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은 뭐가 되나'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그것은 단지 형평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질문이다. ‘누가 책임을 지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그 책임이 개인에게 있든, 사회 시스템에 있든, 또는 그 둘 모두에게 있든 간에, 이제는 그 책임의 분배가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임 없는 연민은 또 다른 폭력이다

우리는 자주 ‘이해’를 강요받는다. 실패한 사람들, 무너진 사람들, 갚지 못한 사람들. 그들의 사정은 물론 복잡하고 절박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가 지금 요구하는 이해는, ‘책임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면제에 대한 이해’다. 그것은 정의의 다른 얼굴이 아니라, 책임의 포기일 뿐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쩔 수 없잖아.” “경제가 너무 어려웠잖아.” “코로나가 왔잖아.”
하지만 그 위기 속에서도 묵묵히 빚을 갚은 사람들은 왜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듣지 못하는가? 왜 그들에게는 어떤 연민도, 감면도 없었는가?

나는 묻고 싶다.
대출을 결정했던 금융기관은 왜 면책을 받고 있는가?
심사를 느슨하게 해준 공공기관은 왜 한 마디 반성도 없는가?
스스로의 계산과 판단으로 무리하게 돈을 빌린 사람은, 왜 ‘구조적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재정의되는가?

이야기를 듣다 보면, 책임은 늘 ‘외부’에 있다. 구조, 환경, 타이밍.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이 사회의 도덕적 중심은 무너지고 있다.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가장 먼저 상처받고 있다는 사실. 그걸 너무 쉽게 잊고 있다.

나는 왜 이 사회에서 점점 더 억울해지는가

요즘 나는 심각하게 이민을 고민한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억울하지 않기 위해서. 나와 같은 사람들—묵묵히 일하고, 남의 돈을 빌릴 때 두 번 세 번 고민하고, 빚은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서 점점 소외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만 억울해지는 게 아니다.
우리는 점점, 이 나라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리스크가 되어버린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국가는 책임을 묻지 않고, 사회는 결과만을 나눈다.
그런 사회에서,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정의는 언제쯤, 다시 성실한 사람들의 편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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