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유재석을 보면서
언제부턴가 우리는 웃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어떤 웃음은 너무 작위적이었고, 어떤 웃음은 누군가를 희생시켜야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씁쓸함을 참곤 했다.
그래서일까. 유재석의 웃음은 이상하게도 ‘믿을 수 있는 웃음’이었다. 불편하지 않고, 누구를 깎아내리지도 않으며, 스스로를 희화화하면서도 절대 자기 자신을 헐값으로 팔지 않는 그 균형감.
그는 웃음을 만들지만, 결코 웃기기 위해 사람을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그리고 그 자세는 한 시절을 통과해 온 우리 30·50세대에게 특별한 위로였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불안하고, 실패하고,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삶. 그래서 유재석이 웃을 때 우리는 안다. 그 웃음이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걸.
불안 속에서 피어난 중심
젊은 유재석은 화려하지 않았다. 짧은 성공 뒤의 긴 무명과 실패의 시간이 길었다. 그 시절 그는 자주 불안했고, 때때로 긴장했고, 겨우 얻은 무대에서의 실수들은 지금까지 희화 되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이 그의 중심을 만들었다. 동료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고, 자신의 실수 앞에서 웃음을 자아내며, 조금씩 대중과 신뢰를 쌓아간 시간. 그렇게 유재석은 지금의 유재석이 됐다. ‘성공한 개그맨’이 아니라, '대중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예전엔 유명세만 있으면 권력에 붙고, 사회적 약자 앞에서 군림하던 이들이 있었지만, 유재석은 달랐다. 그는 여전히 공손했고, 약자의 입장에 설 줄 알았고, 말보다 태도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한 시대의 기준이 되었다. “유재석처럼”이라는 말은, 단순히 방송을 잘하라는 말이 아니라, 정직하게 살아보자는 요청이 되었다.
이 변화는 작지 않다.
그는 개그맨이었다. 하지만 이제, 누구도 그를 ‘그저 웃기는 사람’으로 폄하하지 않는다. 그는 ‘성실과 존중의 아이콘’이 되었고, ‘무너져가는 공정의 감각’을 지켜낸 사람으로 자리잡았다.
유재석은 우리 세대의 얼굴이다.
무너질 수 있었지만 무너지지 않았고, 게을러질 수 있었지만 성실을 선택했고, 누구보다 빠르게 성공하려는 욕심보다, 오래 신뢰받는 길을 택했다.
그의 웃음은 얄팍하지 않고, 그의 성공은 운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삶을 보며 ‘공정’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그 단어가 현실에서는 너무 멀게 느껴질 때가 많았지만, 유재석을 보면 그 단어가 아직 이 사회에 가능하다는 신호처럼 보인다.
나는 유재석이 웃을 때, 내 마음도 덩달아 놓인다. 그가 웃는다는 건, 여전히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길이 열려 있다는 뜻이고, 진심을 잃지 않은 사람이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증거니까.
그래서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오늘도 유재석이 즐거웠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그가 웃는 얼굴로 오래오래 우리 앞에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고.